앙리 팡탱 라투르(이하, 팡탱 라투르)는 1860~1900년대 활동한 프랑스 화가입니다. 이 시대는 우리가 잘 아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활동했던 시절이죠. 사실 저도 잘 모릅니다. 한국에 알려져 있지 않거든요. 저도 최근에 그의 작품을 보고 “어, 이 작품 괜찮은데?”하고 알게 되었어요. 기록도 많지 않고 특별히 유명하지 않은데, 재밌는 건 그림은 잘 팔렸어요. 빈센트 반 고흐는 자신의 작품 가격이 물감보다 비싸길 바랬다고 하는데, 꽤 의외죠.
그는 프랑스 화가이지만 정작 프랑스에서는 인기가 없었습니다. 당시에 쟁쟁한 낭만주의, 인상주의 예술가 이름만 적어도 A4 한 장을 채울 정도로 많았던 것도 있지만, 그가 많이 그렸던 정물화가 당시에 소위 ‘급’이 낮은 주제로 보는 인식이 있었다고 하네요. 유구한 계급론의 역사를 가진 프랑스라 그럴 수도 있죠.
그는 루브르 박물관에 모사를 하러 자주 다녔다고 합니다. 거기서 23살(1859년)에 휘슬러란 미국 화가를 만나요. (사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아내도 만납니다. 이 정도면 그림 그리러 간 건지 사람 만나러 간 건지) 휘슬러는 런던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런던에 꼭 와보라고 권유했고, 이듬해 팡탱 라투르는 친구 만나러 런던으로 갑니다. 그렇게 몇 차례 런던을 다녀오고, 26살(1862년)이 되던 해에 영국 로열 아카데미 여름 전시회에 출품을 합니다. 프랑스와 달리 영국은 정물화가 인기 있는 주제였고, 영국인들은 파리 스타일의 신선함에 반해버렸죠. 이후 그는 매년 영국 로열 아카데미에 출품하며, 영국의 수집가들 사이에 인기 작가로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이후 30여년간 프랑스에서 작업실을 두고 활동하였음에도 정작 프랑스에서는 친구들 초상화 외에는 특별히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친구들이 모네, 에밀 졸라, 로댕, 들라크루아를 비롯하여 당대 제일 잘나가던 셀럽들이긴 합니다.) 파리 살롱전에도 꾸준히 출품하였다는 기록은 있지만, 당선되지는 않았다네요.
팡탱 라투르가 53세가 되던 해에 네덜란드에서 <살아있는 거장전(Living Masters)>에 초대를 받습니다. 영국과 네덜란드에서는 유명작가로 인기가 많았거든요. 당시의 영국과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제일 돈 많은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그의 작품이 2,000길더라는 거액에 판매되며 큰 화제가 되었죠. 이게 어느 정도 일이냐면, 200여년 뒤에 지구의 정반대 아시아의 한국이라는 나라에 사는 저까지 알 수 있을 정도 일입니다. 서울의 어느 아파트가 100억에 팔렸다고 해도 200년 뒤에 칠레 사람 누가 알겠어요? 어쨌든 당시 노동계층의 1년 생활비가 400~600길더 정도이고, 4~5년치 생활비에 해당하는 돈이니 정말 큰 돈이긴 하죠.
생각해보면 그의 인생은 현대인이 꿈꾸는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미술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동료 화가들만큼 기재가 넘쳐났던 것은 아니었고, 프랑스에서는 급이 낮은 화가로 치부되었지만, 자신을 알아주는 세상에서 자신의 화풍을 지키며 인정받았던 화가였습니다. 게다가 화가인 아내와 매년 노르망디의 별장에서 여름 휴가를 즐기며 함께 그림을 그렸다고 하니 정말 부족함이 없는 삶이 아닌가요? 생각해보면 프랑스가 오히려 그의 가치를 몰라봤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앙리 팡탱 라투르(이하, 팡탱 라투르)는 1860~1900년대 활동한 프랑스 화가입니다. 이 시대는 우리가 잘 아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활동했던 시절이죠. 사실 저도 잘 모릅니다. 한국에 알려져 있지 않거든요. 저도 최근에 그의 작품을 보고 “어, 이 작품 괜찮은데?”하고 알게 되었어요. 기록도 많지 않고 특별히 유명하지 않은데, 재밌는 건 그림은 잘 팔렸어요. 빈센트 반 고흐는 자신의 작품 가격이 물감보다 비싸길 바랬다고 하는데, 꽤 의외죠.
그는 프랑스 화가이지만 정작 프랑스에서는 인기가 없었습니다. 당시에 쟁쟁한 낭만주의, 인상주의 예술가 이름만 적어도 A4 한 장을 채울 정도로 많았던 것도 있지만, 그가 많이 그렸던 정물화가 당시에 소위 ‘급’이 낮은 주제로 보는 인식이 있었다고 하네요. 유구한 계급론의 역사를 가진 프랑스라 그럴 수도 있죠.
그는 루브르 박물관에 모사를 하러 자주 다녔다고 합니다. 거기서 23살(1859년)에 휘슬러란 미국 화가를 만나요. (사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아내도 만납니다. 이 정도면 그림 그리러 간 건지 사람 만나러 간 건지) 휘슬러는 런던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런던에 꼭 와보라고 권유했고, 이듬해 팡탱 라투르는 친구 만나러 런던으로 갑니다. 그렇게 몇 차례 런던을 다녀오고, 26살(1862년)이 되던 해에 영국 로열 아카데미 여름 전시회에 출품을 합니다. 프랑스와 달리 영국은 정물화가 인기 있는 주제였고, 영국인들은 파리 스타일의 신선함에 반해버렸죠. 이후 그는 매년 영국 로열 아카데미에 출품하며, 영국의 수집가들 사이에 인기 작가로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이후 30여년간 프랑스에서 작업실을 두고 활동하였음에도 정작 프랑스에서는 친구들 초상화 외에는 특별히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친구들이 모네, 에밀 졸라, 로댕, 들라크루아를 비롯하여 당대 제일 잘나가던 셀럽들이긴 합니다.) 파리 살롱전에도 꾸준히 출품하였다는 기록은 있지만, 당선되지는 않았다네요.
팡탱 라투르가 53세가 되던 해에 네덜란드에서 <살아있는 거장전(Living Masters)>에 초대를 받습니다. 영국과 네덜란드에서는 유명작가로 인기가 많았거든요. 당시의 영국과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제일 돈 많은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그의 작품이 2,000길더라는 거액에 판매되며 큰 화제가 되었죠. 이게 어느 정도 일이냐면, 200여년 뒤에 지구의 정반대 아시아의 한국이라는 나라에 사는 저까지 알 수 있을 정도 일입니다. 서울의 어느 아파트가 100억에 팔렸다고 해도 200년 뒤에 칠레 사람 누가 알겠어요? 어쨌든 당시 노동계층의 1년 생활비가 400~600길더 정도이고, 4~5년치 생활비에 해당하는 돈이니 정말 큰 돈이긴 하죠.
생각해보면 그의 인생은 현대인이 꿈꾸는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미술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동료 화가들만큼 기재가 넘쳐났던 것은 아니었고, 프랑스에서는 급이 낮은 화가로 치부되었지만, 자신을 알아주는 세상에서 자신의 화풍을 지키며 인정받았던 화가였습니다. 게다가 화가인 아내와 매년 노르망디의 별장에서 여름 휴가를 즐기며 함께 그림을 그렸다고 하니 정말 부족함이 없는 삶이 아닌가요?
생각해보면 프랑스가 오히려 그의 가치를 몰라봤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