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시절, 패션 잡지를 넘기면 페이지마다 가십과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학교에서 배우던 패션사 수업은 ‘이런 일이 있었다’는 식으로 간단히 넘어가는 수준이었죠. 그중에서도 가장 아쉬웠던 건 크리스챤 디올의 뉴룩(New Look)이었습니다.
한국에서 뉴룩에 대해 접할 수 있는 설명은 대부분 ‘여성성을 되찾아준 혁명’, ‘시대의 흐름을 바꾼 패션’ 같은 찬사로 가득합니다. 근데… 아래 그 유명한 뉴룩 사진을 한번 보실까요?

혁명의 기운이 느껴지시나요? 저만 이해하기 어려운 걸까요? 그럼 지금부터는, 제가 바라본 뉴룩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대중'이 선택한 최초의 패션
디올이 뉴룩을 발표했을 때, 대중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대부분은 ‘디올이 이런 걸 했고, 기존 패션과 어떻게 달랐다’는 식으로 설명하지만, 제가 주목한 건 ‘대중’이라는 단어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유럽 사회는 여전히 귀족과 서민이 뚜렷하게 나뉘어 있었고 상류층이 주류였습니다. 서민은 지금과 비교도 안 되게 가난했죠. 그런데 이 시기에 서서히 사회의 중심축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다수였지만 비주류였던 서민들이 점점 더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 거죠. 그런 상황 속에서 상류층의 전유물이던 패션을, 대중이 열광적으로 받아들인 겁니다. 단순한 유행이었다면 그냥 흘러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서민들이 뉴룩을 만들어 입기 시작했다는 게 포인트예요.
당시 10대 소녀들이 집에 있던 커튼을 뜯어 뉴룩을 만들어 입어 사회적 문제라는 재미있는 기록도 있습니다. 너무 입고 싶었던 나머지 말이죠. 놀랍지 않으세요? 당시엔 원단이 귀했고, 배급량도 제한되어 있었거든요. 유니폼 한 벌에 3~4야드면 충분한데, 뉴룩은 무려 2~30야드를 필요로 했다고 하니까요. 광기어린 철없는 10대 소녀가 그 많은 원단을 어디서 구하겠어요?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이름'을 붙이다
"It’s such a new look!"
이 말, 디올이 한 게 아니었습니다. 당시 하퍼스 바자 편집장이 뉴룩을 보고 외친 말인데, 이 표현이 그대로 대중에게 퍼졌죠. 단 두 단어지만, 누구나 단번에 이해했습니다. 심지어 10대 소녀도 말이죠. 마케팅 역사에서 패션 분야의 최초 성공 사례라고 봐도 될까요?
디올은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었던걸까요? 이후 Y라인, A라인, H라인 같은 직관적인 이름을 자신이 디자인한 패션에 붙입니다. 누구나 딱 보면 이해할 수 있도록요.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유행은 쭉 이어졌죠.
어떻게 뉴룩 스타일을 입은거지?
근데 여기서 궁금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10대 소녀가 직접 만들어 입었다고? 미국에서도 유행했다던데, 대체 어떻게?
이 시기는 아직 기성복이 없던 시절입니다. 돈 없는 서민들은 대부분 옷을 직접 만들었죠. 게다가 디올의 옷은 주문 제작이었고, 가격도 당시 기준으로 300~500달러(오늘날 600~1,000만원)였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평균 월급이 30~50달러 정도였으니, 서민이 사려면 10개월을 안 쓰고 꼬박 모아야...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기록이 또 하나 있어요. 바로 패션 잡지 부록으로 재봉 패턴을 줬다는거예요. 요즘에도 잡지를 사면 사은품이나 굿즈를 주잖아요? 잡지에 실린 그림을 보고, 그 재봉 패턴을 활용해서 직접 옷을 만든 거죠. 미국에서도요. 그런데 이번 호의 부록이 뉴룩 스타일의 재봉 패턴이다? 안 살 수 있을까요?
현대 패션 산업의 DNA
디올의 뉴룩은 단순한 유행 이상이었습니다. 대중이 패션 소비의 주체가 되기 시작한 순간이었죠. 옷을 직접 보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이름, 미디어를 통한 강력한 이미지, 대중이 직접 손에 넣을 수 있는 패션. 이 모든 요소들이 지금 우리가 익숙하게 누리는 패션 산업의 기본 구조와 닮아있어요. 뉴룩은 현대 패션 산업의 시작점이자 DNA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결국 디올이 대중을 자유롭게 해준 게 아니라, 이미 움직이고 있던 대중사회의 흐름을 크리스챤 디올씨가 재빠르게 읽고 캐치한 것이죠.
그러니까 진짜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바로, 당신, 그리고 우리입니다.
학생 시절, 패션 잡지를 넘기면 페이지마다 가십과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학교에서 배우던 패션사 수업은 ‘이런 일이 있었다’는 식으로 간단히 넘어가는 수준이었죠. 그중에서도 가장 아쉬웠던 건 크리스챤 디올의 뉴룩(New Look)이었습니다.
한국에서 뉴룩에 대해 접할 수 있는 설명은 대부분 ‘여성성을 되찾아준 혁명’, ‘시대의 흐름을 바꾼 패션’ 같은 찬사로 가득합니다. 근데… 아래 그 유명한 뉴룩 사진을 한번 보실까요?
혁명의 기운이 느껴지시나요? 저만 이해하기 어려운 걸까요? 그럼 지금부터는, 제가 바라본 뉴룩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대중'이 선택한 최초의 패션
디올이 뉴룩을 발표했을 때, 대중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대부분은 ‘디올이 이런 걸 했고, 기존 패션과 어떻게 달랐다’는 식으로 설명하지만, 제가 주목한 건 ‘대중’이라는 단어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유럽 사회는 여전히 귀족과 서민이 뚜렷하게 나뉘어 있었고 상류층이 주류였습니다. 서민은 지금과 비교도 안 되게 가난했죠. 그런데 이 시기에 서서히 사회의 중심축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다수였지만 비주류였던 서민들이 점점 더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 거죠. 그런 상황 속에서 상류층의 전유물이던 패션을, 대중이 열광적으로 받아들인 겁니다. 단순한 유행이었다면 그냥 흘러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서민들이 뉴룩을 만들어 입기 시작했다는 게 포인트예요.
당시 10대 소녀들이 집에 있던 커튼을 뜯어 뉴룩을 만들어 입어 사회적 문제라는 재미있는 기록도 있습니다. 너무 입고 싶었던 나머지 말이죠. 놀랍지 않으세요? 당시엔 원단이 귀했고, 배급량도 제한되어 있었거든요. 유니폼 한 벌에 3~4야드면 충분한데, 뉴룩은 무려 2~30야드를 필요로 했다고 하니까요. 광기어린 철없는 10대 소녀가 그 많은 원단을 어디서 구하겠어요?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이름'을 붙이다
"It’s such a new look!"
이 말, 디올이 한 게 아니었습니다. 당시 하퍼스 바자 편집장이 뉴룩을 보고 외친 말인데, 이 표현이 그대로 대중에게 퍼졌죠. 단 두 단어지만, 누구나 단번에 이해했습니다. 심지어 10대 소녀도 말이죠. 마케팅 역사에서 패션 분야의 최초 성공 사례라고 봐도 될까요?
디올은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었던걸까요? 이후 Y라인, A라인, H라인 같은 직관적인 이름을 자신이 디자인한 패션에 붙입니다. 누구나 딱 보면 이해할 수 있도록요.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유행은 쭉 이어졌죠.
어떻게 뉴룩 스타일을 입은거지?
근데 여기서 궁금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10대 소녀가 직접 만들어 입었다고? 미국에서도 유행했다던데, 대체 어떻게?
이 시기는 아직 기성복이 없던 시절입니다. 돈 없는 서민들은 대부분 옷을 직접 만들었죠. 게다가 디올의 옷은 주문 제작이었고, 가격도 당시 기준으로 300~500달러(오늘날 600~1,000만원)였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평균 월급이 30~50달러 정도였으니, 서민이 사려면 10개월을 안 쓰고 꼬박 모아야...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기록이 또 하나 있어요. 바로 패션 잡지 부록으로 재봉 패턴을 줬다는거예요. 요즘에도 잡지를 사면 사은품이나 굿즈를 주잖아요? 잡지에 실린 그림을 보고, 그 재봉 패턴을 활용해서 직접 옷을 만든 거죠. 미국에서도요. 그런데 이번 호의 부록이 뉴룩 스타일의 재봉 패턴이다? 안 살 수 있을까요?
현대 패션 산업의 DNA
디올의 뉴룩은 단순한 유행 이상이었습니다. 대중이 패션 소비의 주체가 되기 시작한 순간이었죠. 옷을 직접 보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이름, 미디어를 통한 강력한 이미지, 대중이 직접 손에 넣을 수 있는 패션. 이 모든 요소들이 지금 우리가 익숙하게 누리는 패션 산업의 기본 구조와 닮아있어요. 뉴룩은 현대 패션 산업의 시작점이자 DNA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결국 디올이 대중을 자유롭게 해준 게 아니라, 이미 움직이고 있던 대중사회의 흐름을 크리스챤 디올씨가 재빠르게 읽고 캐치한 것이죠.
그러니까 진짜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바로, 당신, 그리고 우리입니다.